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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지붕을 올리고, 창문까지 설치했을 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일단 입주(?)를 했다.

아직 방문들도 없고, 화장실 설치도 안 했고, 

심지어 현관문과 뒷문도 안 달려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 미장은 꼭 전문가가 해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비싼 인건비를 주고 미장쟁이를 불러, 흙으로 바닥 마감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흙이 마르면서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

미장쟁이가 일을 쉽게 하려고, 흙반죽에 물을 너무 많이 탄 것이다.

흙집은 입주 하기 전에 몇 달 말리기 때문에, 건조시키능 중이었고,

계절은 바닥미장을 가을에 해서 겨울의 중간을 향해 가고 있던 때였다.

바닥의 갈라진 틈은 몇 mm수준이 아니라 1-2cm가 보통이고, 

심한 곳은 3cm 가 넘었다.

뉴스에 가끔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졌다고 하면서 나오는,

그 화면서 보이는 그 갈라진 논바닥처럼, 그렇게 우리 집 바닥이 갈라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상태는 심해지는데,

바닥을 다시 손볼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상태를 보면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늦봄부터 짓기 시작한 집이 미완성이지만

그 다음에 1월 마지막날 그냥 입주를 하기로.



(차마 올리기 힘든.. 하지만 그나마 몸에서 상태가 좋은 막내의 엉덩이 아래쪽 허벅지.

당시 찍은 사진들 중 그나마 덜 심해 보이는 사진. 더 이상 입주를 미룰 수 없는 이유)


현관문이 없어서 하우스용 비닐을 쳤는데, 그 사이로 드나들었고,

뒷문은 아예 잡색보온덮개로 가린 후 못을 쳤다.


화장실이 없어서 낮엔 옆동네에서 살던 집을 이용하고,

빨래 역시 그렇게 옆동네로 들고 다니며 해결했다. 

부엌엔 수도만 연결되어 있어서 고물상에서 구입한 업소용 작은 싱크대를 놓고

밥을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집안의 바닥은 맨발로 다닐 수 없어서, 신발을 신고 다녀야만 했고,

잠자는 방만 유일하게, 지붕에 사용하고 남은 광목을 깔아두고 맨발로 다녔다.

잠은 광목 위에 요와 이불을 깔고 잤다. 

신발은 방문없는 문에 달아둔 광목방문(???) 밖에 둔 채 말이다.

이 당시 막내 1돌 반, 둘째 7살, 첫째 9살이었다.

그 불편함을 아이들은 해맑게 견디며 지냈다.



(사진 설명 : 신발이 있는 쪽이 복도. 사진 상단 중간 밝은 부분이 비닐문(?) 설치한 현관문)


창문은 많았는데, 커튼이 없어서 광목을 그냥 잘라서 못을 치고 지냈다.

처음엔 그냥 지냈는데 불을 켜는 오후 늦게가 되면, 

밖에서 너무 들여다보여서 가리게 되었다.

전등도 설치되지 않아 임시로 작업등 들을 켰고,

한 밤중 아이들의 화장실은 유아변기를 이용해야 했다.

한 겨울이라 너무 추워서 

자다 깬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밥은 겨우 했지만, 상도 없어서 처음엔 신문지 깔고 둘러앉아 먹었다.

아이들은 그것도 재미있어 했다.

그러다 냉장고 대신 사용한 아이스박스를 이용하고,

찻상을 구해다가 거기서 먹기도 했다.


쓰고 보니 무슨 난민 생활같은데, 10년전의 2월~5월 이야기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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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처럼, 짧게 글을 쓰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글이 흘러간다.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끌고 가는 착각마저 든다.


우여곡절끝에 지금 사는 곳의 초등학교로 첫째 아이를 전학시키고,

전쟁같은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마을 텃세에 집 짓는 비용를 수백이나 뜯기고

(동네 인사차원이 아니라, 집 짓는 자격(?)같은 게 필요하단다.

우리는 외지인이라 없어서, 이를테면 그런 자격을 빌리는 비용을 냈다.

나중에 보니, 그런 거 없더라. 

돈 돌려달라하니, 이미 술먹는 데 다 썼다고. 동네 분들이 마신 게 아니라,

돈을 받은 그 분 혼자...ㅜㅜ 집 짓는 비용 한 푼이 아쉬운데.)


흙집 짓는 이야기만 해도 할 말이 참 많다.

이건 나중에 다른 꼭지로 써 봐야 겠다.


집 짓는 땅의 인근에 집을 얻어서 살면서 남편은 흙(황토)을 구하고,

인부를 구하고, 수 많은 자재를 구하러 다녔다.

황토를 구하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남쪽만 해도 황토가 많지만 수도권쪽은 황토가 귀했다.

그러다보니 가격도 비싸고...


집의 서까래는 편백을 사용하기로 하고, 전라도 지역을 뒤져서 편백을 구했다.

그런데 몰랐던 사실 하나.

정작 편백 서까래를 판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편백과 삼나무를 구분하지 않았다.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삼나무와 편백을 구분해서, 편백만 취급하는 곳을 찾아 어렵게 구입하였다.


(당시 자료를 구하던 중, 일본에서는 삼나무 알레르기가 많다고 하여,

삼나무는 무조건 피했다. 

현재 업데이트 된 자료가 있나 찾아보니, 삼나무 꽃가루로 인한 알레르기 환자가 많다고 한다.

편백의 꽃가루도 문제라는 기사도 있는데, 삼나무에 비해 매우 적다고 한다.

나무 수가 적어서 적다는 것인지, 꽃가루 자체의 영향이 삼나무보다 적다는 것인지,

기사를 읽고는 잘 모르겠다. ㅠㅠ

또, 꽃가루만의 문제인지, 나무 자체도 문제가 되는가에 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자작나무 같은 경우 나무 자체가 알레르기를 유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자작나무로 목공을 하다가 사과알레르기에 걸린 사례를 보았고,

우리 아이들의 경우도 E0 등급의 자작나무합판임에도 

합판을 책상처럼 매일 얼굴 가까이 사용하다가 

얼굴에 아토피가 확 올라와 고생한 경험이 있다.

일본은 아토피가 워낙 많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관련 연구가 많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과 많이 달라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벽과 바닥은 황토, 벽에 군데군데 육송, 

서까래와 개판(서까래와 서까래 사이를 막은 판재)은 편백을 사용하여 지은 집이다.

황토집 혹은 흙집이라고 해도 시멘트같은 것을 섞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선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무조건 자연재료만. 그리고 나무들도 해롭지 않은 나무들만 사용했다.

그래서 집을 유리로 만든 꽃마냥 조심 조심(!!!) 다뤄야 한다.


덧글 : 이야기가 자꾸 길어진다.

       다음엔, 간단하게 결과만 써야 하나 고민이 된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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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 아이들 황토집에서 12년째 사는 이유_1

아토피 아이들 황토집에서 12년째 사는 이유_2

아토피 아이들 황토집에서 12년째 사는 이유_3


(아직 아토피가 진행중이라 그런지, 다시 기억하는 게 어렵다..

오랜만에 쓰느라, 잠깐 핑계를 대본다)


주택은, 그 때까지 살아온 삶에서 고려 해 본 적이 없는 카테고리였다.

주택이라...

일단 동네부터 찾아보았다. 

당시 구기동에 사촌언니가 살고 있어서 그 동네를 찾아보았다.

이런...고급동네다. 비싸다.

서울과 가깝고 정리 잘된, 분당이나 일산의 주택지.

차를 타고 둘러보기만 했는데, 괜찮아보였다. 

당연했다. 여기도 고급주택. 비싸다.

이런 저런 현실적인 벽들에 부딪히자, 이젠 땅을 보러 다니게 되었다.

수도권의 땅들을 찾아보았다. 지금 사는 곳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그러다 어찌저찌하여, 지금 동네의 땅을 사고, 직접 집을 짓기로 하였다.

업체를 선정하여 맡기는 게 아니라, 설계부터 시공까지 우리가 직접 하기로 한다.

황토집을 짓기로 하였기에, 여기저기 자료 조사를 하였고,

그러던 중 사각형이 아닌 원통형으로 흙집을 직접 짓는 것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다.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가 짓는 것이었다.


지금은 흙집을 짓는 업체가 좀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전무하였고,

있어도 한옥의 형태라 비용이 정말 비쌌다.

당시 일반적인 주택을 짓는 가격이 보통 평당 500 만원 정도였는데, 한옥은 1000 만원부터 시작이었으니까.

책을 읽고 저자에게 연락 해락 해 보니, 지어주기는 하는데, 일단 흙집은 관리가 어려워서

흙집 짓는 교육을 받는 사람에 한해 지어준단다.

고민 끝에 4주였나? 한달인가 하는 교육을 받기로 하고, 거금의 교육비를 냈다.

그리고 당시 심한 둘째와 세째를 데리고 교육 장소(펜션 겸함)에서 따로 머믈기로 했다.


첫째 아이는 같이 갈 수 없던 이유가, 1학년 입학을 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첫째아이의 입학식은 금요일이었다. 

교육은 바로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시작이라, 일요일에 첫째 아이만 친정에 맡긴 채 내려갔다.

당시에 선택의 여지를 생각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갔는데, 가족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가 버리고,

외가에서 한 달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첫 손주라 정말 사랑 많이 받았고,

매일 등학교를 시켜주셨지만,

그래도 그래도...

동생 돌보느라 신경 잘 못 써주는 엄마라도 있는 게 나았을텐데...

(학창시절이었나. 못나도 울엄마 라는 글인지 책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문구를 본 기억이 난다. 못난 엄마라도 있는 게 낫다는...ㅜㅜ)

학교 처음 입학한 그 낯선 환경에서, 

가뜩이나 내향적이고 조용한 첫째 아이는 묵묵히 학교를 다녔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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