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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지붕을 올리고, 창문까지 설치했을 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일단 입주(?)를 했다.

아직 방문들도 없고, 화장실 설치도 안 했고, 

심지어 현관문과 뒷문도 안 달려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 미장은 꼭 전문가가 해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비싼 인건비를 주고 미장쟁이를 불러, 흙으로 바닥 마감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흙이 마르면서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

미장쟁이가 일을 쉽게 하려고, 흙반죽에 물을 너무 많이 탄 것이다.

흙집은 입주 하기 전에 몇 달 말리기 때문에, 건조시키능 중이었고,

계절은 바닥미장을 가을에 해서 겨울의 중간을 향해 가고 있던 때였다.

바닥의 갈라진 틈은 몇 mm수준이 아니라 1-2cm가 보통이고, 

심한 곳은 3cm 가 넘었다.

뉴스에 가끔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졌다고 하면서 나오는,

그 화면서 보이는 그 갈라진 논바닥처럼, 그렇게 우리 집 바닥이 갈라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상태는 심해지는데,

바닥을 다시 손볼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상태를 보면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늦봄부터 짓기 시작한 집이 미완성이지만

그 다음에 1월 마지막날 그냥 입주를 하기로.



(차마 올리기 힘든.. 하지만 그나마 몸에서 상태가 좋은 막내의 엉덩이 아래쪽 허벅지.

당시 찍은 사진들 중 그나마 덜 심해 보이는 사진. 더 이상 입주를 미룰 수 없는 이유)


현관문이 없어서 하우스용 비닐을 쳤는데, 그 사이로 드나들었고,

뒷문은 아예 잡색보온덮개로 가린 후 못을 쳤다.


화장실이 없어서 낮엔 옆동네에서 살던 집을 이용하고,

빨래 역시 그렇게 옆동네로 들고 다니며 해결했다. 

부엌엔 수도만 연결되어 있어서 고물상에서 구입한 업소용 작은 싱크대를 놓고

밥을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집안의 바닥은 맨발로 다닐 수 없어서, 신발을 신고 다녀야만 했고,

잠자는 방만 유일하게, 지붕에 사용하고 남은 광목을 깔아두고 맨발로 다녔다.

잠은 광목 위에 요와 이불을 깔고 잤다. 

신발은 방문없는 문에 달아둔 광목방문(???) 밖에 둔 채 말이다.

이 당시 막내 1돌 반, 둘째 7살, 첫째 9살이었다.

그 불편함을 아이들은 해맑게 견디며 지냈다.



(사진 설명 : 신발이 있는 쪽이 복도. 사진 상단 중간 밝은 부분이 비닐문(?) 설치한 현관문)


창문은 많았는데, 커튼이 없어서 광목을 그냥 잘라서 못을 치고 지냈다.

처음엔 그냥 지냈는데 불을 켜는 오후 늦게가 되면, 

밖에서 너무 들여다보여서 가리게 되었다.

전등도 설치되지 않아 임시로 작업등 들을 켰고,

한 밤중 아이들의 화장실은 유아변기를 이용해야 했다.

한 겨울이라 너무 추워서 

자다 깬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밥은 겨우 했지만, 상도 없어서 처음엔 신문지 깔고 둘러앉아 먹었다.

아이들은 그것도 재미있어 했다.

그러다 냉장고 대신 사용한 아이스박스를 이용하고,

찻상을 구해다가 거기서 먹기도 했다.


쓰고 보니 무슨 난민 생활같은데, 10년전의 2월~5월 이야기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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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처럼, 짧게 글을 쓰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글이 흘러간다.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끌고 가는 착각마저 든다.


우여곡절끝에 지금 사는 곳의 초등학교로 첫째 아이를 전학시키고,

전쟁같은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마을 텃세에 집 짓는 비용를 수백이나 뜯기고

(동네 인사차원이 아니라, 집 짓는 자격(?)같은 게 필요하단다.

우리는 외지인이라 없어서, 이를테면 그런 자격을 빌리는 비용을 냈다.

나중에 보니, 그런 거 없더라. 

돈 돌려달라하니, 이미 술먹는 데 다 썼다고. 동네 분들이 마신 게 아니라,

돈을 받은 그 분 혼자...ㅜㅜ 집 짓는 비용 한 푼이 아쉬운데.)


흙집 짓는 이야기만 해도 할 말이 참 많다.

이건 나중에 다른 꼭지로 써 봐야 겠다.


집 짓는 땅의 인근에 집을 얻어서 살면서 남편은 흙(황토)을 구하고,

인부를 구하고, 수 많은 자재를 구하러 다녔다.

황토를 구하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남쪽만 해도 황토가 많지만 수도권쪽은 황토가 귀했다.

그러다보니 가격도 비싸고...


집의 서까래는 편백을 사용하기로 하고, 전라도 지역을 뒤져서 편백을 구했다.

그런데 몰랐던 사실 하나.

정작 편백 서까래를 판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편백과 삼나무를 구분하지 않았다.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삼나무와 편백을 구분해서, 편백만 취급하는 곳을 찾아 어렵게 구입하였다.


(당시 자료를 구하던 중, 일본에서는 삼나무 알레르기가 많다고 하여,

삼나무는 무조건 피했다. 

현재 업데이트 된 자료가 있나 찾아보니, 삼나무 꽃가루로 인한 알레르기 환자가 많다고 한다.

편백의 꽃가루도 문제라는 기사도 있는데, 삼나무에 비해 매우 적다고 한다.

나무 수가 적어서 적다는 것인지, 꽃가루 자체의 영향이 삼나무보다 적다는 것인지,

기사를 읽고는 잘 모르겠다. ㅠㅠ

또, 꽃가루만의 문제인지, 나무 자체도 문제가 되는가에 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자작나무 같은 경우 나무 자체가 알레르기를 유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자작나무로 목공을 하다가 사과알레르기에 걸린 사례를 보았고,

우리 아이들의 경우도 E0 등급의 자작나무합판임에도 

합판을 책상처럼 매일 얼굴 가까이 사용하다가 

얼굴에 아토피가 확 올라와 고생한 경험이 있다.

일본은 아토피가 워낙 많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관련 연구가 많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과 많이 달라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벽과 바닥은 황토, 벽에 군데군데 육송, 

서까래와 개판(서까래와 서까래 사이를 막은 판재)은 편백을 사용하여 지은 집이다.

황토집 혹은 흙집이라고 해도 시멘트같은 것을 섞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선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무조건 자연재료만. 그리고 나무들도 해롭지 않은 나무들만 사용했다.

그래서 집을 유리로 만든 꽃마냥 조심 조심(!!!) 다뤄야 한다.


덧글 : 이야기가 자꾸 길어진다.

       다음엔, 간단하게 결과만 써야 하나 고민이 된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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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한달 교육을 받고 돌아와서 4,5월 아이를 학교 보내보니, 참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학교는 같은 단지였고, 문구점은 길 건너 단지에 있었는데,

담임이 자꾸 우리 첫째아이에게만 아침에 준비물 샘플를 문구점에서 가져오라는 것이다.

반이상이 건너 단지에서 살았음에도 말이다.

막내를 업고, 둘째 손을 잡고, 학교로 걸어가다가 학교 울타리와 만나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큰 길을 건넌다.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서 걸어간다. 다시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되짚는 것이다. 

건너 단지의 아파트 상가의 문구점은 2층. 가서 준비물 샘플을 가지고 학교로 가야 했다.

아침 8시가 채 안된 상가안은 어두 컴컴하다.

비상구의 불빛만으로 계단을 올라가 건물내부를 가로질러 불켜진 문구점을 찾아가야 했다.


샘플을 준비하라 했으니, 우리 아이보고, 

아침에 들러서 가져오라는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이상했다. 

나중에 친청 엄마에게 여쭤보니, 그게 봉투를 가져오라는 뜻이란다.

(그 때는 촌지받지 않기를 했었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강남에 살고 있던 후배에게 몇 년 후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강남의 학교를 선생님이 거쳐가면

차를 바꾸고 아파트 평수가 바뀐다고. 교육청에 신고할텐데? 아니란다. 전혀. 

학부모들이 모두 당연하게 생각해서 신고하는 사람이 없단다. 뭐 당연히 조사할 일도 없겠지..

김영란법이 있는 지금은... 없어졌다고 믿고 싶다.)

 


이야기가 샜다. 갑자기 열이 받아서.  계속해서 당시 이야기를 해본다.

그 때 공개 수업이 있어서 셋째 아이를 업고 갔었다.

아이가 칭얼거려 교실과 복도를 왔다갔다 하며 사진을 찍었다.

한 5~6년 전에 컴퓨터 정리하다가 그 사진을 봤었는데,

그 전에 보면서도 인지하지 못했던 광경이 보였다.

복도에서 아이를 찍다보니, 교실 맨 뒤의 엄마들까지 나왔다.

쪼르르 서 있는 열 댓명의 엄마들은 모두 풀메에 정장.

그리고 그 중 일곱 명인가 들고 있는 가방은 똑같은 루***. 그것도 같은 모델..ㅜㅜ

가방 동호회 번개인 줄.


둘째 아이가 문질러 생긴 진물 얼룩이 군데 군데 있는 목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이 살짝 나온 바지.

첫째부터 사용해서 낡아버린, 빛 바래고 때가 탔으며, 진물 얼룩이 뭍은 포대기로,

얼굴이 벌건 아기를 업은, 대충 머리를 틀어올려 묶은 화장기 하나 없는 어떤 엄마.

그게 나였다.


그런 화려한 차림의 엄마들은 무언가를 주었을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피해를 우리 첫째 아이가 고스란히 받았고.

그 와중에 다행이라 해야 하나. 

첫째 아이는 선생님이 공주님처럼 예쁘다고 좋아해서, 힘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풀메이컵에 완벽한 이자이자머리 세팅, 화려한 치마 정장에 악세사리도 고급스러운,

패션도 완벽하고 세련된 선생님이셨다.


그리고 5월 마지막날 전학을 했다. 

이후로도 첫째 아이에게 미안한 일은 계속 일어났다.

엄마가 처음이다보니, 모두 시행착오와 경험부족, 그리고 지혜롭지 못함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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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 아이들 황토집에서 12년째 사는 이유_1

아토피 아이들 황토집에서 12년째 사는 이유_2  에 이어서


둘째아이가 5살이던 2006년 여름, 동생(셋째 아이)이 태어나면서,

전신의 아토피가 다 사라졌던 둘째는, 갑자기 온몸이 뒤집어졌다.

순식간에 한 여름임에도 중증아토피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동생이 생긴 스트레스로 온몸이 뒤집어지다니...)


새집 증후군을 피해 오래된 아파트로,

그것도, 그 곳에서 살아보고 아이 상태가 괜찮아 진 곳으로 이사했는데,

다시 전신중증아토피라니...

어떻게 해야 하나 적극적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동네의 변화(근처 재건축)도 걱정이던 참이라,

세째 임신 하면서부터, 이사 고민을 하긴 했었다.

나중에 땅 사서 집을 지으면 어떨까 하는 남편의 제안에

그냥 수도권에 땅보러 다니기도 했었다.


하지만, 둘째의 뒤집어진 상태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스트레스가 심한 것,

점점 공기가 나빠지는 것(교통량의 증가로 매연 증가)

주변 재건축으로 대규모 공사로 인한 분진발생.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또 다시 이사를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사를 결심한 후, 여기저기 알아봤다.

좀 더 외곽의 아파트

좀 더 산과 가까운 아파트

당연히 지은지 좀 오래된 아파트

(이 무렵 "새집증후군"이라는 말과 함께 

방송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남편의 파격적인 제안. 

마당 있는 주택으로 이사가자는...

4살부터 아파트생활을 했기에, 주택은 너무 무서운 곳이었다.

아...

주택에서 어떻게 살아.

너무 무서운데...

(주택살이 12년째인데, 이젠 아파트에선 못 살겠다. 

나참...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나, 원~

아주 가~~~~~~~끔 서울의 친정에 가서 잘 경우,

너무 밝은 불빛과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친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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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 아이들 황토집에서 12년째 사는 이유 1편" 에 이어서


역시, 다시 나빠지고... 엄마가 이번엔 아예 와 있어보라고 하신다. 

다행히 방학기간이어서 한 달 정도 아이들은 친정에 두고, 

나만 아이들 용품, 옷가지 등 때문에 왔다 갔다하며 지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둘째 아이는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였고,

결국 남편과 상의 끝에 이사를 하기로 했다.

(2년 전세를 겨우 1년 남짓 살아서 복비 다 물어주고..ㅠㅠ)


친정에서 한달있기로한 방학기간부터 

이사결정 후 다시 한 달 넘게 이사 전까지 지내는 당시, 

아버지께서 다니시는 근처 사우나의 물이 좋다고 하시며 

엄마와 함께 새벽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셨다. 

( 아파트 단지 근처 육각수 시설을 설치한 사우나. 

아버지께서 매일 새벽마다 다니시는 곳이다.

지금은 문을 닫았다. 물이 좋긴 정말 좋았다.)


진물 때문에 목욕도 쉽지 않을 때였고, 

학교 근처 우리집은 아토피 때문에 

연수기를 렌탈해서 달아놓은 상태였는데, 

친정집은 그렇지도 않아 살짝 걱정되기도 했었다.

(매일 목욕을 해야 하는데, 수돗물 목욕을 하면 급격히 나빠짐)


당시 둘째 아이는 잘 걸어다녔고,

(아토피로 인해 잠을 잘 못자서 잘 크지도 않아 엄청 작았었다.) 

얼굴은 아토피 때문에 새빨갛게 피부가 한 풀 벗겨져 보였으며 

진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였다. 

(물론 전신이 다 그랬지만, 한 여름에도 긴팔, 긴바지를 입어서 

몸상태를 남들은 볼 수 없었다)

 

학교 안 가는 날은 따라갔었는데(아직 이사전)

참 험한 말을 많이 들어야 했다.

진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의 몸을 보고 전염병인 것 같은데,

나가라는 둥,

(당연히 탕속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가 오히려 감염될 수도 있는 상황)

화상환자냐, 병원 얼른 가라,

아토피는 엄마가 태교를 못해서 그렇다는데 어쩌구 저쩌구.

(이건 엘리베이터에서 들었다. 나를 힐끗거리며 대놓고 뭐라 하니..ㅜㅜ

그것도 작은 소리도 아니고, 나 들으라고 일부터 크게 말해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아~ 잊어야 하는데~~)


그 당시 친정부모님께서 

아이들 갈아입을 옷에 수건, 보습제까지 챙기셔서 

거의 매일 사우나를 다니셨다.

따가와서 우는 그 어린 아이를 달래가며,

우두커니 서서 우는 동생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큰 아이에게 말 한마디 걸며,

그렇게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주신 엄마의 모습이

눈 앞에 본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새벽마다 두 분이 아이들 하나씩 손 잡고 다니셨을

그 길을 생각하니, 울컥한다.


또 틈나는 대로 단지 내 공원의 소나무아래에서 놀게 하셨다.

소나무에서 피톤치드가 나와 좋을 거라고 하시면서...

(피톤치드는 나중에 흙집을 지을 때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나는 나대로 학교다니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전적으로 매달렸다.

엄격한 식단관리 했고, 아토피에 좋은 보조제 먹였으며, 

씻고 바르는 것 또한 열심히 했었다. 

밤이고 낮이고(학교를 4일만 나가도록 시간표 짰음) 

바르고 문질러주기.... 

밤에 목욕 후 30분이상 문질러준다.

밤중에는 수시로 깨서 긁으면 보통 1~2시간씩 

두 세번은 문질러줘야 했었다.

(이 때가 정말 힘들었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으니..)


하여간, 우여곡절끝에 이사를 했다.

이사 후 생활이 안정이 되니

(두 집 살림 정말 힘들다.)

아이들도 더 편안해지고, 더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참, 아토피 생긴 생후 6개월부터 어린이집 다니기전까지

약 2년 반동안 나는 엄청난 스킬이 생겼다.

아기업은 채 침대에 살포시 업드려 자기...

물론 처음부터 그럴 순 없었다.

가려워 벅벅 긁는 아기를 업고 밤을 보내다보니,

너무 졸린거다.

처음엔 벽에 기댄 채 졸았다.

그 다음엔 소파에 살짝 걸터앉아 졸았다.

그러다 앉은 채 기대어 졸았다.

그리고 마침내, 업은 채  챔대발치에서 무릎을 구부린 후

살살 엎드려 잤다. 

이 때 무릎아래 다리는 침대 밖에 있어야 한다.

아기가 칭얼거리면 바로 일어나야 하니까.


그 후, 둘째 아이 35개월부터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2년 다녔는데, 

다니기 시작한 지 반년 쯤 된 여름엔 온몸의 아토피가 거의 없어졌다.

정말 기적같이 느껴졌었다.

물론 가을-겨울-봄에 이어지는 건조한 시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시기는 1년을 넘지 못했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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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있는 집은 흙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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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이 태어남-10년된 아파트

둘째 생후 4개월 이사-3년된 아파트-아토피 발병, 큰 아이도 나타남(경증)

둘째 생후 15개월-17년된 아파트에서 1주, 1주, 2주 지내봄,

둘째 생후 18개월-17년된 아파트로 이사

둘째 6살 6월 이후-지방에 흙집을 직접 짓기 위해 지방의 주택으로 이사

둘째 7살 이후 - 미완성 흙집에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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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전 둘째 아이의 아토피를 알게 되어, 

이런 저런 방법을 찾아가던 시절,

집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었다.

(당시 아토피에 대한 방송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환경, 새집증후군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살던 곳은, 서울 시내의 중심 근처였고, 

살고 있던 아파트는 지은지 3년이 채 안된, 

그러니까 1999년 11월 준공된 건축된 아파트였다.

내 공부 때문에 학교와 가까운 그 지역으로 둘째 4개월 때 이사했다.

(둘째가 태어난 곳은 1992년 4월 준공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1999년즈음부터 아파트 건축자재-시멘트(6가크롬 등 중금속), 내부 마감-가 

엉망이 되던 때라고 한다. 오래 전이라 가물가물...)


그 곳으로 이사한 후 두 달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양 볼에서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하여간, 병원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일산 백병원에 잘 하는 선생님 소개받아 그 곳을 다니며 

약한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제를 1년 넘게 먹였었다.

그 와중에 2003년 여름, 학교 방학하자 친정에서 잠시 쉬라고 하셔서 

아이들을 데리고 며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친정엄마밥 덕분인지, 아이가 좀 나아진 기분이 들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꾸덕꾸덕해진 진물이 다시 나오는 느낌?

이상하다... 엄마와 통화하며 말씀드리자 다시 오라고 하셨다.

친정에서 1주일을 더 지냈고, 이번엔 가족 모두 관찰. 

진물이 꾸덕꾸덕해졌다.  (흐르던 진물이 멈추고 마르면서 나아지는 현상)

내가 그냥 편해서겠거니...하며,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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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00년, 

첫 아이가 태어난 이후 여러 육아정보를 습득하던 중 아토피에 대한 글을 간간히 보았다.

(이 당시가 처음으로 아토피라는 것을 알게 된 때)


잘 알려지지 않은 때였고, 정보도 거의 없었다.

첫째 아이는 태열이 있다가, 사라졌기에, 설마 하며 걱정했던 마음을 다 잊었었다.


2년 후 둘째 아이가 태어났고, 태열인 줄 알았던 좁쌀같은 오돌도돌한 것들이 없어지지 않았다.

생후 4개월 쯤 조금씩 보이다가 6개월이 되었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었다.


첫째 아이 때와는 전혀 다르게, 점차 사라지기는 커녕 진물까지 났다.

그 작은 좁쌀같은 것들이 점점 발개지면서, 점점 많아지면서,

진물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토피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검색하다 알게 된 한 싸이트에 가입하여 

수 많은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지금은 아토피에 대해 많이 알려져있고, 

방송에서도 연예인이 나 아토피야~ 하는 말까지 하는 시대지만,

그 때는 아토피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았고, 

그저 흔치 않은 심한 피부병(!) 처럼 여겨지는 때였다.


다시 돌아가서, 

그 당시 싸이트의 글을 읽으면서 아토피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아기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한쪽 볼에서 시작한 아토피는, 양볼로, 팔, 다리, 배, 등...

전신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정보를 찾았다. 

이 후 해 본 것들만 해도 참...

병원도 1년 넘게 다니며, 약 역시 1년 넘게 먹고, 바르고...

수수팥떡이라는 당시 유명한 모임에도 갔다.

     (이 때, 둘째와 동갑인 아토피 아기 엄마를 만났다. 나와도 동갑이라 친구했는데...친구야 잘 지내니..)

주변에서는 아토피에 좋다는 제품들을 권유했고, 

당시 남편 월급의 반이 넘는 고가의 제품을 부모님께서 사 주시기도 했다. 뭐라도 해 보라면서..


아기는 가려워서 날마다 울고, 긁고...

아토피가 있는 부위(없는 부위를 다 합쳐봐야 내 손바닥만한 면적이 나올까...)에서 나는 진물로

옷을 입고 벗기는 것 조차 힘들었었다..


=====================================

현재도 막내 아이가 진행형이다보니,

글을 쓰는 게 쉽지가 않다...

지난 자료를 더 찾아보고. 조금씩 정리를 해 나가야 겠다.

아토피 알게 된 지 17년... 참 징-허다.


아토피는, 발 맞추어가면서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 점점 멀어지게 해야 하는 것.

미워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감정의 동요도 하지 말고...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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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 전이다.

2002년. 아토피를 처음 만났다. 생후 6개월의 둘째 아이를 통해서.

당시엔 아토피가 흔하지 않았지만, 이슈로 떠오를 때였다.


태열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아기는 전신 중증 아토피안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 후로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보통 사람들이 아이가 아토피에요...하면서 울 듯한 얼굴로 얘기할 때

아이의 상태를 보면, 경증이다.

그저 무릎뒤거나, 손목이거나, 손등이거나...

조금 더 심한 경우 목에 있거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서 진물이 흘렀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아이 둘은 전신이었다. 그것도 중증...

아토피가 심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짐작조차 못한다.

그 상태를 아예 상상할 수 없겠지.

방송이나, 혹는 이런 인터넷 등을 통해 본 경우 아니라면,

상상이 안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그 부모들(의 마음은 찢어지겠지만)의 표현이,

때론 조-금 불편할 때도 있다.(동시에 떠오르는 아이들 생각도 한 몫 하리라)

이젠 그러려니 넘겨버리지만..

그리고 아직 내 아이들은 그 길위에 있지만,

험한 가시밭 길은 지나왔기에,

다행이다...

스스로에게, 또 아이들에게 마음의 토닥임을 한다.


잘 했어. 잘 지나왔어. 고생했어.

지금도 좋은 상태 아니지만, 나아질 거라 믿어.




지난 오랜 세월의 아토피 이야기를...

조금씩 써 볼까 한다.

아이들에게 얼마나 너희가 잘 해 왔는지의 기록을 남겨주고 싶다.

Posted by vivaZze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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